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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로서 마지막 문고리를 잡는 심정으로
이름 동산가족센터 작성일 14-11-06 17:30 조회 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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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로서 마지막 문고리를 잡는 심정으로


                                                                                                            작성자: 김형선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남편과 나 사이에 있는 빙산보다 더 차갑고 단단한 아픔과 상처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을 느끼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부모의 기다림과 축복 속에서 이 땅에 태어나도 아픔이 있는 삶일 터인데 나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갖은 욕설과 죽어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에 나왔다. 탯줄이 잘림과 동시에 죽으라고 뒤집어 놓고 엄마가 내 곁을 떠난 날이 내가 태어난 날이다.
강원도 바닷가를 앞마당 삼아 혼자 일어나고 혼자 밥을 먹고 어둑한 저녁, 할머니가 장에서 돌아오시면 저녁을 먹고 또 잠을 자고… 거의 매일을 혼자 지내던 때에 학교를 갈 나이가 되어 혼자 개울가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데 한 아줌마가 내 곁에 서 있었다. 바로 내 엄마라고, 난 그때까지 엄마, 아빠라는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했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부부학교를 하면서 내면치료를 받으며 발견한 첫 사건이 바로 개울가에서 혼자 머리를 감고 있던 이 사건이었다. 그때 나의 별칭은 까치인데 엄마의 기쁜 소식을 간절히 바라던 어린 소녀의 마음이었다. 나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엄마라면 혼자 머리를 감고 있는 딸을 안고 머리를 제대로 감아주고 손을 잡고 서울로 가자고 했어야 했는데 엄마는 큰 목소리로 빨리가자! 그 단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나는 엄마한테 또 버림을 받을까봐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는 따라 나섰다.

이전까지는 나는 왜 머리를 빨리 감는지에 대해 성격이 급해서인가보다 싶었는데…
처음 만난 엄마인데 또 떠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머리를 감았을 어린 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데 그 후 일주일간 아침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울음이 나오더니,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천천히 감을 수 있게 되었고 앞머리가 이마를 가려도 답답하지 않았다.
서울에 오자, 엄마는 새 아빠와 살고 있었는데 내가 6학년 되던 때에 헤어진 후 술장사를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첫 소풍을 갈 때도 내가 김밥을 싸 갈 정도로 엄마는 따뜻한 밥상을 차려준 기억이 없다. 학용품이나 다른 필요한 물품을 사주기도 아까워하면서 돈만 악착같이 모으셨다. 술장사를 할 때도 방 한 칸 얻어줄 수 없어 다락방에서 생활하게 하고 밤새 고래고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집에 오면 청소를 하고 엄마를 위해 상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난 이것이 내가 살아가야하는 삶인가보다 생각했다. 옷도 제대로 사주지 않아 엄마 옷을 많이 입고 다녔기에 동네 남학생들은 나더러 ‘옥떨메’라고 놀렸다. 중3이 되던 무렵 친구가 전도를 했는데 난 그 친구에게 소리쳤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이렇게 힘들게 살게 하지 않을 거라고….”

엄마는 내가 잠을 자고 있으면 그것도 못마땅해서 자고 있는 나를 깨워 머리를 벽에 치면서 뺨을 때리곤 했다. 자살을 하려고 칼을 사다 손목을 그었는데 살이 벌어져서도 핏줄이 터지지 않아 죽는 것도 맘대로 안 되었다.
처음 서울로 상경했을 때 나는 이유는 모르지만 매 주일 교회를 찾았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신기하게 교회에 갈 때마다 나를 반겨주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선생님이 단 한분도 안계셨다. 그 어린 맘에도 교회는 나 같은 사람이 오면 안 되는 곳이구나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기에 그 이후로 교회는 가기 싫었다.

그러다 고1때 동네에 있는 개척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새벽 예배부터 철야까지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결혼을 하면 엄마를 벗어날 것 같아 최대한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을 몇 번 만나지 않았을 때도 남편이 나를 사랑한다기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남편은 나에게 무척 잘해 주었다. 집안일을 거의 하다시피하여 나는 남편을 위해 음식만 하면 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착한 남편을 보고 남편 복이 많다느니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우리부부는 대화가 없는 부부였다. 남편은 나에게 완벽을 요구했지만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숨이 막혔고 미칠 것 같았다. 때로는 남편과 싸우고도 싶었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려치면 그때마다 남편은 외면을 하고 회피하였다. 살기 싫었고 귀에서는 죽으라고 환청도 들리기 시작했다.
가족사랑만들기 부부학교를 하면서 처음에는 다 내가 잘못해서 가정이 엉망인지 알았다. 나만 결점과 상처가 많은 여자처럼 보였고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회복을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답답함이 풀어지지 않고 있을 무렵, 심상수업을 하면서 남편의 어릴 적 중요한 사건이 발견되었다. 어릴 때부터 시부모님은 싸움이 심하셨단다. 7살 때 남편은, 하루는 어머님이 도망가시려고 보따리를 싸서 대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남편이 엄마 가지 말라고 울며 매달려서 어머니가 도망가실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은 그때부터 어머님이 집을 나가실까봐 걱정이 되어 부엌을 서성거리면서 가슴을 조아리며 그저 어머님 좋아하시는 일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 셋 가운데서 제일 집안일을 잘 도운다고 어머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남편은 지금껏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이나 음식이나 가고 싶은 곳이나 갖고 싶은 물건 등 자신만을 위해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것을 알고 나니 결혼생활에서 남편이 했던 일들이 해석되어졌다. 남편은 나에게도 어머님처럼 집을 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늘 내 눈치를 보면서 집안일만 열심히 했던 것이다. 엄마가 도망갈까봐 애타하면서 혼자 울고 있는 어린 남편의 모습이 떠올려지면서 남편이 애처로워지고 불쌍해졌다.
정태기 원장님과 수업을 할 때 남편에게 물으셨다.
“부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 때 남편은 몇 가지 소망을 말했다.
그러자 원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금 당신의 부인은 어떠한 틀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모습, 어머니 모습,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바라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뒤통수가 울렸다.
“아, 그랬구나! 그동안 틀도 없으면서, 아무런 경험도 없으면서, 아내의 모습을 흉내 내느라, 며느리 모습 흉내 내느라, 아이들 엄마노릇 흉내 내느라, 믿음이 있는 척, 사랑하는 척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렇게 나는 우리 부부의 문제의 원인을 하나씩 하나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 나의 문제가 발견될 때 마다 열심히 치유받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남편은 전혀 변화의 모습이 없었다. 남편은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자신만의 밀폐된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매주 한번씩 남편과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하면서 이제는 나도 남편이 기댈 수 있는 안전한 둥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은 자신이 성인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자아의 발견과 치유에 관계된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은 나만 치유가 되면 우리가정은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었단다. 그러나 올해 초 영성수련을 다녀와서 남편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여보, 그곳에 있으면서 당신 생각만 하면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던지… 난 당신이 울어도 왜 우는지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미안해. 혼자 외로웠을 당신 생각만 하면 눈물만 나와. 나, 이제부터 노력해볼게. 그동안 감정없는 나하고 사느라 고생 많았어. 고마워!”

그 이후로 우리는 그동안 한번도 싸워보지 못했던, 아니 제대로 싸워보지 못했던 부부싸움도 하게 되었고 속으로 꾹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꺼내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역아동센터의 문을 열어 주셔서 요즘 다양한 가정에서 자라난 어린 학생들을 보살피고 있는데 만약 우리 부부가 회복이 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갔을까, 아찔하다. 남편과 나의 마음은 확실히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사람이 되었고 3년 전 설악산 켄싱턴 호텔에서 울렸던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잠든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이러한 사랑을 위하여 지금 노력을 하고 있다. 남편은 요즘 “여보, 나도 연구원 일반과정을 공부하고 싶다. 이제는 피하지 않고 제대로 하고 싶어.”라는 말을 하기에 우리는 준비하고 있다.

우리 부부로 인해 세워질 많은 가정들을 보면서, 지금도 지역아동센터의 학생들과 부모님들을 세우는데 사용하고 계시는 나의 하나님… 그렇기에 강원도 바닷가에서 탯줄이 잘리자마자 버려졌던 나를 일으키시고 안아주시고 눈물 닦아주시며 회복시킨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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