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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을 벗고 서로를 보다는 것
이름 동산가족센터 작성일 14-10-22 12:28 조회 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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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유아기 때 난 외가댁에 있었다. 아빠의 잣은 사업실패로 가정이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매일의 일상은 나를 두고 간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시간이 내게 있어 가장 긴 기다림이었다. 막차의 문이 열릴 때 한사람씩 뚫어지게 바라보며 엄마이기를 고대하는 아이의 먼먼 기다림은 내 안에 외로운 섬을 안겨줬다.

초등학교 입학 때가 돼서야 나는 가족과 합류했고, 시골에서의 느림의 시간들에 비해 서울의 시간들은 너무나 달랐다. 어눌하고 느린 아이가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건만 늘 부족한 아이였다. 그 속에서 난 착한 아이로 엄마의 마음을 채워보고자 늘 노력하는 아이였다. 27살 여름, 난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암에 걸린 지 6년째였다. 엄마의 만족과 웃음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허망하게 갔다. 엄마의 빈자리는 나를 텅 비게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난 엄마하고만 살았다. 아빠이면서 엄마였던 내 부모를 한꺼번에 떠나보낸 난 졸지에 고아가 된 것 같았다.

한꺼번에 몰려온 외로움과 허망함, 그리고 억울함까지 지금까지 내 생에 있어 가장 추운 겨울이 찾아 왔다. 그때 나타난 지금의 남편은 나에게 주님의 보상으로 보였다. “이제 수고했다고, 그러니 이제 이 사람에게 기대서 이젠 편히 좀 쉬라고” 주중엔 논술교사, 주말엔 교육전도사, 엄마의 병원수발까지, 난 너무 지쳐 있었다. 누군가 이젠 나를 지탱해 줬으면 싶을 만큼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어머니가 엄마처럼 보였었고, 나도 이젠 가족이 생긴다는 두근거림에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설레임도 잠시였고, 결혼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내가 기대했던 따뜻한 가족, 이젠 나의 보호자가 옆에 있으니 난 그 그늘에서 쉬리라는 기대도 물거품 같았다. 둘만의 시간도 없이 찾아온 육아의 시간들… 남편은 몸은 함께 있었지만 정서적으론 없는 사람 같았다. 하숙생처럼 시간되면 들어와서 밥 먹고, 자신의 생활을 짜여진 대로 해나가는 그와 대화는 없었다. 너무 맘이 상해 꺼이꺼이 울 때면 남편은 그저 나를 쳐다보며 방관하기 일수였다. 특히 시댁에서의 나의 자리는 부모 없이 남의 집 살이 하는 기분이었다. 시어머니가 나쁜 분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면 안 그럴 텐데…” 내 안에 계속해서 엄마와 비교하고 있었다. 남편은 시댁가면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방에서 잠을 자거나 TV를 보면 그뿐, 시어머니는 아들을 쉬게 하기 위해 애를 쓰셨고, 그와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하면서 얼마나 숨죽여 울었는지 모른다.

우린 마치 아이 때문에 말을 하고, 아이 때문에 관계하는 것 같았다. 이러다 아이가 부쩍 크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우린 치유상담연구원에 등록했다. 평소에 우리 부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그래 보였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고, 깊은 어둠속에 혼자 무서워 벌벌 떨며 흐느껴 울었었다. 그런데 영성수련이후 우리 부부는 많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되었고, 내면에 웅크린 외로운 아이와의 만남이후 가족사랑 만들기에 등록했다.

부부학교를 하면서 내가 가진 가장 큰 수확은 남편의 도통 모를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말을 시켜서 겨우 몇 마디 들을 수 있었다.
“밥 먹었어요” “응” “뭐 먹었어요?” “밥”
그러니 그렇게 말을 시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혼 전엔 말수 없는 것도 멋있어 보였는데, 결혼하니 그것이 나를 미치게 했다. 그런데 과정을 하면서는 둘이서 안 되는 얘기도 여럿이 나누다 보니 꺼내게 되고, 5년여의 시간동안 한 번도 못 들어 본 얘기들이 6개월의 시간동안 물고를 틀 수 있었다. 내 안의 묶여있던 어떤 매듭이 풀림으로 날아다닐 것만 같았기에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성이랄까! 은근슬쩍 난 또다시 웅크리며 내 안에 갇혀 갔었다. 체념이었다. 처음에는 뭔가 보이는 것 같더니 문제의 원인을 다 배우자의 것으로 보기 시작하자 실망과 체념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를 돌릴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었는데, 가족사랑 만들기가 빠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실망도 되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자신이 나와의 만남을 하지 않고, 또한 그와의 온전한 만남을 하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 “이런 걸 하면 뭐해. 고작 저 모양인걸!” 오히려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마고' 강의를 들으며 왜 우리의 관계가 파도였다가 호수였다가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아빠의 빈자리, 그리고 아버지의 어떤 만져짐과 역할도 없었던 것에 대한 화가 남편과 나사이에 존재했기에 위기의 순간엔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배우자가 배우자로서 내 앞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를 그리도 모른 척 하며 방관했던 아버지와 오버랩 되면서 뼈 속 깊은 미움이 번졌던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별로 없었기에 엄마와의 문제로만 집중했던 1년여의 시간이였는데…, 내 무의식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변했고, 급기야는 아무도 모르는 화약고를 내면에 장치한 채 결혼이란 도피처로 숨어버린 거였다. 엄마로 인해 상처받은 남자와, 아빠로 인해 상처받은 여자는 위기의 순간에 배우자가 보이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상황에서는 표출되지 않던 것들이 어느 한쪽이 위태한 상황이 되면 반복되는 이 틀을 우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마지막 수업에서 일어났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난 인정했다. 아빠를 그리도 무시하던 엄마의 모습이 내 안에 있고, 그런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배우자에게 엄마와 똑같이 대했었노라고. 남편은 날 버려두고 늘 자리에 없었던, 엄마가 살아계신 동안 내내 비난하고 무시했던 아버지였다.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가장 싫어하던 엄마의 모습을 내가 또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았다. 난 평생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난 엄마가 원하던 남자와 결혼했다. 엄마가 내게 그려준 이상형의 남자다. 훤칠한 키에 입이 무거운 그리고 잘생긴.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화날 때 날 방치하며 없는 사람처럼 존재했다. 아빠처럼… 모든 결정을 내가 해야 했고, 내가 맞서야 했다. 너무 버거웠다. 엄마의 보호자였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젠 남편이 있으니 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한걸음 뒤에 있는 것 같았다. 난 그걸 못 참아서 엄마처럼 그를 비난하며 무시했다. 이런 나를 보며 남편은 너무도 싫었던 시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그럼으로 더 다가오지 못했다. 시아버지보다 항상 먼저 나서서, 일처리 하신 시어머니! 그를 기다려 주지 못하고, 답답해하며, 실수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대신해버리던 시어머니의 모습 말이다. 이런 모습에 그는 웅크리고, 비난받지 않으려고 앞서 나가지 못했다. 머뭇거리며 거리를 두고, 시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그저 따라갈 뿐이다.

아, 우리 안엔 상처받은 이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제대로 봐주지 않으면서 보여지는 모습과 행동만으로 관계하려 했었던 우리였구나!

이제 그가 보인다. 화나는 일에도 화낼 줄 모르고 마냥 점잖기만 한 그! 늘 괜찮다는 듯이 초연한 모습으로 있는 그이지만 그 안의 아픔이 느껴졌다. 상처가 보였다. 엄마와 달라서 나를 만났다는 그가 내게 다그치고 재촉하며 기다려주지 않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보일 때, 그 안의 내면아이는 얼마나 불안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고 못하여 어쩔 줄 모르는 아이. 이제까지 모르던 병명을 안 기분이다.

이렇게 우리의 부부학교 초급과정은 마무리되었다. 병명을 알았으니 이제 치료를 할 차례다. 우리 부부는 중급도 공부하기로 했다. 이제야 뭔가에 눈을 뜬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짐으로 더 깊은 사이로 들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씌어진 비늘을 벗고 서로를 본다는 건 너무나 멋진 일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남편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지.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아는 것 같았으나 참 우매했던 것을 깨닫는다.
6개월 동안 잔잔하게 우리와 함께해 주신 리더 부부께 감사를 드린다. 내 안의 나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쉼 없는 기도에 더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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